[선임기자 리포트] 포스트 포르노 신호탄인가… 성폭력의 눈속임인가
첫 4일간 2억6600 달러 벌어 R등급 1위 '매트릭스 3' 2배 "성적 환상의 영화적 일탈" 에 "로맨스로 치장한 여성폭력" 잠시 영화 속으로 떠난 현실도피냐, 아니면 가정폭력을 부추기는 여성 비하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이하 그레이)'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한쪽엔 잠시 현실을 벗어나 성적 환상을 꿈꾸는 영화적 일탈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쪽엔 영화의 내용이 BDSM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비하이고 가정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BDSM은 손을 묶는 등의 구속(Bondage), 징벌(Discipline)과 지배(Domination), 복종(Submission)이나 가학(Sadism), 피학(Masochism)을 의미한다. 수갑을 채우거나 묶고 눈을 가리거나 엉덩이를 때리는 등 상대를 지배하고 학대하면서, 동시에 이런 학대와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는 물론 '그레이'가 처음이 아니다. BDSM 자체만 보면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이를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 외에도 같은 소재의 영화는 무수히 많다. 문제는 BDSM이 가장 활발한 곳은 포르노라는 점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포함해 주류 영화에서 주로 상대를 묶는 것이 여주인공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기시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원초적 본능'에서도 '색, 계'에서도 여주인공이 남자의 손을 묶는다. 그나마도 천 등 상징적인 도구를 사용한다. 수갑으로 손을 채우는 좀 심각한 설정은 대부분 웃고 넘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에 등장한다. '그레이'는 좀 다르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결박하고 징벌하고 지배한다. 표현의 강도는 다르지만 남녀의 역할과 이들을 바라보는 앵글이 포르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 소설이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일부의 보이코트 속에서 개봉된 '그레이'의 흥행은 전세계에서 1억 권 이상 팔린 원작의 힘을 감안한다 해도 놀랍다. 13일 개봉해 3일동안 8500만 달러를, 프레지던트 데이까지 4일 동안 944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에로틱 스릴러 최고 기록이다. 같은 기간 전세계 기록은 더 놀랍다. 4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그레이'는 모두 2억6600만 달러를 거둬들였다. R 등급 영화로는 첫 주말 흥행 1위 기록을 갖고 있던 '매트릭스 3 레볼루션(Matrix Revolutions)의 1억1700만 달러를 2배 이상 능가했다. 22일까지 전세계 흥행은 4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 정도면 변태적 행위라고 비난만 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급 현상이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1년 중 가장 로맨틱하고 달콤한 날인 밸런타인스 데이가 들어있는 주에 주류사회의 한복판에서 개봉됐다. 또 미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레이'의 흥행 성공은 그래서 인터넷과 모바일을 타고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포르노가 존재하는 '포스트 포르노'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포르노가 일상화된 시대에 적어도 일상을 벗어난 일탈을 대리만족하는 영화에서 BDSM는 이제 로맨틱한 행위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BDSM은 더 이상 변방이나 구석방의 훔쳐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레이' 관객의 68%가 여성이었고 58%가 25세 이상이었다는 점, 타겟이 채찍과 수갑, 족쇄, 눈가리개, 가면을 모은 기획상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레이'는 주류문화에서 포스트 포르노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만큼의 대중적 수용도를 보여줬다. '그레이'에 대한 비판은 가정폭력을 부추기고 미화한다는 주장으로 모인다. 미시건 주립대학 에이미 보노미 교수는 "(남자 주인공) 크리스천은 학대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여주인공) 아나스타샤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아나스타샤를 스토킹하고 위협하고 친구와 가족에게서 고립시킨 뒤 결국 성폭력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보노미 교수는 "성적 행위 중에 알콜을 사용하고 여자를 압박해 불편해 하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은 성폭행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포르노 문화 저지 모임'의 게일 다인스 대표는 "(이 영화는) 여성에 대한 학대와 폭력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다인스 대표는 "폭력을 로맨스로 치장했다"며 여성 4명 중 1명이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미화하고 합법화했다"고 비판했다. 페이스북에서 '그레이'에 대한 항의시위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시슬 패터슨은 "이 영화는 포르노를 주류사회로 끌어들이는 관문과 같은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섹시하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그레이'를 둘러싼 논란은 그 성격상 영화를 둘러싼 이전의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현실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를 둘러싼 시각차의 다. 한쪽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쪽은 영화는 관객의 의식, 나아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물론 영화를 본다고 모든 사람이 영화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스크린 안에만 머문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에서는 벌써 수갑을 풀지 못 해 경찰에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비판론자들의 주장의 핵심 중 하나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동의하지 않는 여자 주인공을 계속 압박한다는 점이다. 성에서 '노'는 '노'다. 안유회 기자